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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키 분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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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마키 분노신은 조슈 번의 하급 무사로, 쇼카손주쿠를 열어 조카 요시다 쇼인을 가르쳤다. 그는 야마가 류 병법을 가르쳤으며, 노기 마레스케가 그의 집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번정 참여와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했으며, 아들의 전사, 2차 조슈 정벌 등을 겪었다. 쇼카손주쿠의 재개교 후 교장으로 복귀했으나, 제자의 난으로 인해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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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키 분노신
기본 정보
씨명스기 씨 (杉氏) → 다마키 가문 (노기 씨 (乃木氏) 분파)
다른 이름통칭: 분노신
호: 간포, 교쿠온
시대에도 시대 말기 - 막말 - 메이지 시대
출생 및 사망
출생분카 7년 9월 24일 (1810년10월 22일)
사망메이지 9년 (1876년) 11월 6일
관직 및 직책
주군다카치카 → 모토노리
조슈 번. 군봉행, 당역, 오쿠반구라
가족 관계
아버지친부: 스기 쓰네토쿠 (스기 시치베에)
양부: 다마키 마사미치
형제스기 모모노스케 (스기 쓰네미치)
요시다 다이스케 (요시다 가타요시)
다마키 분노신
배우자고쿠시 씨 (国司氏)의 딸
자녀친자: 히코스케
양자: 마사요시 (노기 마레쓰구의 넷째 아들)
기타
개명쇼이치 → 쇼운 (마사카누, 휘)

2. 생애

1856년(안세이 3년) 요시다 군청 서기(吉田代官)를 시작으로 번내 여러 군의 서기를 역임했다.[2]

1859년(안세이 6년) 군 행정비서(奉行)로 영전되었으나, 안세이 대옥 사건으로 조카이자 쇼카손주쿠의 후임 교장이던 요시다 쇼인이 도쿄에 압송되자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쇼인은 처형되었고, 분노신도 관직이 삭탈되는 동시에 이듬해 쇼카손주쿠는 폐교되었다.[2]

2. 1. 출생과 가계

1810년(분카 7년) 음력 9월 24일 조슈번 하급 무사인 스기 쓰네노리(杉常徳, 통칭 시치베에(七兵衛))의 셋째 아들로 하기시에서 태어났다.[1]

1820년(분세이 3년) 음력 6월 아버지의 상관인 다마키 세이지(玉木正路, 쥬에몬(十右衛門))에게 입양되어 후사를 이었다.[2]

2. 2. 쇼카손주쿠 설립과 교육 활동

1842년 (덴포 13년) 쇼카손주쿠를 열고 13살 짜리 조카 요시다 쇼인을 엄하게 가르쳤다. 이때 그가 가르친 것은 야마가류 병법으로, 소위 '난학(蘭學)'이라 불리던 서양 문물 교육은 아니었다.[2] 60여 년 뒤 여순항 포위 작전 사령관이자 타이완 총독이 되는 노기 마레스케(당시 8살)도 이때 분노신의 집에 기거하면서 여기저기 배우러 다녔다고 전해진다. 노기는 분노신의 사돈으로, 친동생이 분노신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1843년(덴포 14년) 양아버지 세이지가 은퇴하고 정식으로 가장이 되자, 조슈 번청에서 녹봉 40석짜리 청지기(大組証人)가 되었다. 이때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쇼카손주쿠를 사돈이자 친구인 쿠보 고로사에몬(久保五郎左衛門, 쇼인의 외삼촌)에게 넘기고 번청으로 갔다.

1869년(메이지 2년) 교수들에 의해 다시 개교했던 쇼카손주쿠가 경영난에 빠지자 교장으로 복귀했다. 곧 그는 교실을 자신의 저택 안으로 옮겨 후학들을 계속 가르쳤다. 현재 하기시의 쇼카손주쿠 유적은 그때의 것이다.

2. 3. 번정 참여와 존왕양이 운동

1862년(분큐 2년) 요시다 군 조달과 직원(郡用方)으로 재임용되었고, 이듬해 오쿠아부 군(奥阿武,おくあぶ) 서기로 복귀해 영주 옆에서 번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에도 막부와 연락보좌역(江戸行相府 当役)을 맡았다.[2] 그는 번내 존왕양이파로 활동하면서 모리 일족 중 하나인 아사 모리씨(厚狭毛利家)에 고용돼 참모로도 일했다.[1]

1865년(게이오 원년) 외동아들 다마키 겐스케(玉木彦助)가 기헤이타이(奇兵隊)에 입대해 다카스기 신사쿠쇼카손주쿠 동문들과 존왕양이 운동에 투신했다가 고잔지 거병(功山寺挙兵)으로 불리는 존왕파 쿠데타에 참가하여 전사했다.[1] 이미 56세였던 분노신은 역시 전투 중 사망한 다마키 마사요시(玉木正誼)를 양자로 호적에 올려 그의 유복자인 마사유키를 양손주로 삼았다.

1866년(게이오 2년) 제2차 조슈 정벌로 막부군이 쳐들어오자 하기시 수비를 맡았다. 이후 오쿠방가시라(奥番頭, 죠슈 번 최고 집정)를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1]

2. 4. 아들의 죽음과 조슈 정벌

1865년(게이오 원년) 다마키 분노신의 외아들 다마키 겐스케(玉木彦助)가 기헤이타이(奇兵隊)에 입대하여 다카스기 신사쿠쇼카손주쿠 동문들과 존왕양이 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고잔지 거병(功山寺挙兵)으로 불리는 존왕파 쿠데타에 참가했다가 전사했다.[2] 56세였던 분노신은 전투 중 사망한 다마키 마사요시(玉木正誼)를 양자로 들여 그의 유복자인 마사유키를 양손주로 삼았다.

1866년(게이오 2년) 제2차 조슈 정벌에서 막부군이 쳐들어오자 하기시 수비를 맡았다. 이후 오쿠방가시라(奥番頭, 죠슈 번 최고 집정)를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2]

2. 5. 쇼카손주쿠 복귀와 최후

1869년(메이지 2년) 교수들에 의해 다시 개교했던 쇼카손주쿠가 경영난에 빠지자 교장으로 복귀했다. 곧 그는 교실을 자신의 저택 내로 옮겨 후학들을 계속 가르쳤다. 현재 하기시의 쇼카손주쿠 유적은 그 때의 것이다.[2]

1876년(메이지 9년) 쇼카손주쿠의 문하생이자 메이지 신정부 참의 마에바라 잇세이가 불만사족과 동문들을 모아 하기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당하고 제자들이 역적이 되자 그는 선조의 묘 앞에서 배를 갈랐다.[1] 향년 67세. 후계는 양손주인 다마키 마사유키(正之)가 이었다. 노기 마레스케는 그의 조카이기도 하다.

3. 사상과 영향

다마키 가는 노기 덴안의 장남인 다마키 하루마사가 어머니 다마키의 훈공으로 어머니의 아호를 가문 이름으로 분립하여 성립한 가문이기 때문에, 노기 가문과는 대대로 교류가 있었다. 노기 마레스케의 아버지인 키지(希次)와 나이가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했기 때문에 평소 서로 존경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친아들 히코스케가 사망하자 키지의 아들이 분노신의 양자가 되었는데, 이가 다마키 마사요시이다.[1]

4. 기타

다마키 씨는 조슈 지방 호족인 노기 씨의 한 분파로, 에도 시대 초기인 17세기 초 노기 덴안(乃木傳庵)의 장남 다마키 하루마사(玉木春政)가 모친의 성을 따른 것이 분파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노기 마레스케의 노기 씨와 대대로 서로 양자를 들이기도 하고 겹사돈도 맺는 등 교류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노기 마레스케가 어린 시절 그의 집에 기거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분노신의 아들 겐스케가 전사한 후 사돈이자 친구인 노기 마레쓰구(希次, 마레스케의 아버지)의 4남을 후사로 들였는데, 그가 다마키 마사요시(玉木正誼)이다.[3]

다마키 가는 노기 덴안의 장남인 다마키 하루마사가 어머니 다마키의 훈공으로 어머니의 아호를 가문 이름으로 분립하여 성립한 가문이기 때문에, 노기 가문과는 대대로 교류가 있었다. 노기 마레스케의 아버지인 키지(希次)와 나이가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했기 때문에 평소 서로 존경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친아들 히코스케가 사망하자 키지의 아들이 분노신의 양자가 되었는데, 이가 다마키 마사요시이다.

다마키 씨를 비롯한 노기 씨가 사사키 겐지의 겐지가 아닌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피랍된 조선인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일본인도 있다.[3] 그에 반해 노기 마레스케는 공문서에 결재 싸인을 노기 씨의 원래 성씨인 미나모토 마레스케(源希典)라고 곧잘 사용했다고 한다.[4]

5. 현대 등장 작품

참조

[1] 서적 萩市立図書館
[2] 문서 야마가류(山鹿流)
[3] 간행물 임진・정유왜란에 있어서 조선인포로의 후예들: 노기 마레스케의 유래(『壬辰・丁酉倭乱における朝鮮人被虜の末裔 : 乃木希典の由緒』) http://www.lib.kobe-[...] 2015-12-08
[4] 서적 노기 마레스케(부제:그대는 제군의 동생과 아들을 죽였노라)『乃木希典-予は諸君の子弟を殺したり-』 미네르바 쇼보(ミネルヴァ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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